루콜라 입니다.

이탈리아 요리계의 우리나라의 쑥갓쯤 된다고 한다.

루콜라(Rucola /Rocket)
는 지중해연안이 원산으로 재배하기가 쉬운 1년초의 야채로서 이탈리아에서 소비가 많

 

은 엽채류이다.   프랑스어로는 로켓(Rocket), 영어로는 아루굴라(Arugula) 로 불린다.

 

 

줄기의 높이는 60㎝정도이며, 줄기를 잘라 가지를 생육시켜 새로운 잎을 식용한다.

 

잎은 짙은 녹색을 띠고 있으며, 부드럽고 다소 매운맛이 있으며, 깻잎과 비슷한 맛을 내며, 주로 치바현 등에서 생산

 

되어 연중 공급되고 파종 3주후면 먹을 수 있고,

 

거의 모든허브가 병충해를 앓는데 루콜라 역시 벌레가 생겨 매일매일 벌레 잡아줘야 한다.

 

영양가가 매우 높으며, 비타민C는 100g 중 66㎎, 칼슘은 170㎎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요리방법으로는 풍미를 살려 주로 샐러드로 이용된다.

 

특히, 이탈리아 샐러드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야채이며, 가열하면 향기가 너무 강해질 우려가 있으므로 이러한 경우

 

에는 어린잎을 사용한다.

 

기타 ‘허브’로서 그린허브소스 맛으로 이용되고 있다.

by Joanne | 2010/06/04 10:44 | I like it | 트랙백

Steve Jobs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왜 자퇴했을까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2A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by Joanne | 2008/12/02 17:12 | Economy | 트랙백

라떼아트... 정녕 쉽지않구낭~

넘 넘 어려운 라떼아트~~
이것이 진정한 수련인것이야~ 암!

... 오늘은..왠지... 잠이 올것 같지 않다....
... 기분이 좀.. 가라앉는다..
... 카페인 때문인가? -.-;;
... 진한 에스프레소 한잔과, 즉석에서 로스팅된 브라질산 커피를 갈아서 드립으로 한잔 가득 마셨더니...
... 잠이 당췌오질 않는거다.. 쩝..
... 그래도 자야겠다... 아~~~ 고통스럽다~~~

by 리아 | 2007/02/16 01:47 | Everyday | 트랙백

커피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가볼 만한 커피 맛있는 집 6곳

테이크아웃 커피의 시대, 원두커피 한두 잔은 어느새 일상이 됐다. 그런데 정말 제대로 된 맛있는 커피를 마셔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커피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가볼 만한 커피 맛있는 집 6곳을 소개한다.

 

달마이어(예술의 전당점) _ 300년 전통의 독일 왕실 커피

추천인 : 공승식 (한국 바리스타 대회 우승자·롯데호텔 와인 바 ‘바인’ 지배인)
'귀한 손님을 만날 때 찾게 되는 공간입니다. 앤티크하고 품위 있는 실내 분위기와 잔잔히 흐르는 클래식 그리고 깊고 진한 정통 유럽 커피 맛이 최고의 티타임을 실현시켜 줍니다.'


18세기부터 독일 왕실과 귀족들의 커피를 담당해온 커피 명가 달마이어의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곳. 중세 유럽을 옮겨놓은 듯, 문을 열고 들어선 첫 느낌은 한마디로 고급스럽다.

정통 유럽식 커피 맛 재현을 위해 모든 재료는 독일 본사에서 공수해 오며, 최상의 아라비카 원두만을 골라 7분을 넘기지 않고 로스팅한 다음 두 번 정제해 블렌딩한다.

특히 디카페인 커피는 커피 고유의 맛은 그대로 느낄 수 있으면서도 카페인에 민감한 사람이나 위장이 약한 사람에게 부담이 적어 반응이 좋다. 외국에서 로스팅해 들여오지만 원두의 신선도를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개봉 후 2주가 지나도 처음의 맛과 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수송용 원두는 별도의 로스팅과 가공법을 사용한다. 손님들에게 가장 많은 표를 얻는 커피는 경력 4년의 바리스타 홍상의 씨가 즉석에서 만들어 주는 아트 라테와 디자인 카푸치노.

마시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데커레이션된 우유 거품 아래엔 한 모금 머금으면 단맛과 쓴맛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진한 커피가 숨어 있다. 여기에 매일 아침 들여오는 신선한 케이크 한 조각을 곁들이면 금상첨화. 올록볼록 청포도 쿠션이 토핑된 포도케이크와 입에 넣으면 그대로 녹는 티라미슈를 강력 추천한다.


 

코니써 클럽 _ 완벽한 로스팅을 거친 조화로운 맛

추천인 : 이진성 (로스팅 전문가·카페 코니써 클럽 사장)
'맛있는 커피의 핵심은 제대로 된 로스팅입니다. 원두 성격에 따라 달고 쓰고 짜고 신 맛이 최적의 밸런스를 이루도록 볶아서 주문이 있을 때 바로 뽑아 내니 맛있을 수밖에 없어요.'


의미를 궁금하게 하는 카페의 이름은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전원 주택을 닮은 카페 앞뜰에는 국내의 대표적인 로스팅 전문가인 이 사장의 커피 볶는 공장이 있다.

1994년 업무차 일본에 갔다가 거리에서 커피 볶는 노인을 목격한 후 본격적으로 커피 공부를 시작했다는 그는, 1999년 국내 최초로 커피 논문을 발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코니써 클럽 커피의 특징은 누구나 맛있다고 느끼는 커피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디오피아 모카, 탄자니아, 수마트라 등 여섯 가지 원두를 섞어 설탕이나 크림을 넣지 않고도 맛있게 마실 수 있는 부드러운 커피를 만든다.

그래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도 갓 뽑은 원두 커피 그대로를 마시는 스트롱 커피. 첫 맛은 부드럽고 뒷맛은 약간 씁쓸하며 달큼한 여운이 남는다. 인공 가향한 커피라면 결코 지닐 수 없는 아련한 향기는 보너스. 코니써 클럽 마니아를 형성하는 데 한몫했던 포크커틀릿과 정통 독일식 소시지도 추천할 만하다. 후식으로 맛있는 커피가 무료 제공되며 리필도 가능하다.



B-hind _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 만나기

추천인 : 김효경 (커피빈 슈퍼바이저)
'커피 만드는 일을 하다 보니 커피 맛 칭찬에 인색한 편입니다. 그런데 여기 에스프레소를 마셔 보니 너무 맛있는 거예요. 아주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어요.'


골목을 헤집고 다녀야 동네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홍대 부근에서 알음알음 꽤나 입소문이 난 집. 온·오프라인으로 프리 마켓도 열고 종종 전시회도 여는 홍대 앞다운 곳이다.

한창 때 들르면 손님의 반은 디자이너나 기자들. 대표 단골을 자처하는 영화 <스캔들>의 미술감독 정은영 씨는 커피 맛 좋기로 소문난 프랑스 카페들 다 돌아다녀도 비하인드처럼 입에 착 감기는 에스프레소 맛 내는 곳이 없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이곳의 남다른 커피 맛의 비결은 품질 좋은 이탈리아 원두 몰리나리 덕분. 여기에 서현 엄마로 더 유명한 사장의 인심이 더해져 커피로 한 번, 인정으로 또 한 번 즐거워진다. 갓 뽑아낸 에스프레소를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부어 떠 먹는 ‘아포가토 알 카페(Affogato Al Caffe)’를 찾는 손님이 많다. 네 가지 종류의 샌드위치도 인기 아이템. 모두 7,000원.

 


허형만의 압구정 커피집 _ 거리에서 즐기는 호텔 커피

추천인 : 허형만 (로스팅 전문가 겸 커피 강사, 허영만의 커피집 사장)
'널찍한 공간은 제공 못 합니다. 그러나 테이크아웃 한 잔이라도 제대로 된 커피를 원하신다면 들러보세요. 길거리에서도 호텔 수준의 커피를 드실 수 있을 겁니다.'


로스터이자 커피 강사인 허형만 씨가 운영하는 곳. 탁자 세 개가 고작인 조촐한 공간이라 테이크아웃 손님이 많다. 공간이 소박하다고 커피 맛에 의구심을 가진다면 실수.

숍의 절반을 차지하는 로스팅 기계로 바로 볶은 원두를 즉석 분쇄해 커피를 내려 주는데, 유명하다는 호텔 커피만 찾아다니는 이들도 한번 왔다 가면 다시 안 들르고는 못 배길 정도. 머금는 순간 청량음료처럼 상쾌하며 삼키고 나서도 향은 감도는데 잡맛이 남지 않는다.

분명 마셨는데 안 마신 것 같은 묘한 느낌, 이 맛을 잊지 못해 테이크아웃 단골이 끊이지 않는다. 커피에 대한 호기심에 불탄다면 매주 열리는 강좌에도 참석해 볼 것. 참가비는 매회 5,000원이며, 창업 상담도 가능하다.

 

 


Bar OIOI _ 어떤 커피를 선택해도 후회 없는 곳

추천인 : 전광수 (단국대학교 커피 전문가 과정 강사, 전광수 커피 대표)
'어떤 커피를 주문해도 실망시키는 법이 없습니다. 이 집 커피 열 중 여덟, 아홉 가지는 단연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줄 만하지요.'

 

아는 사람만 알고 오라는 듯, 간판도 눈에 띄지 않게 표시만 해뒀다. 카푸치노 한 잔을 시켜 맛을 보면 그 자신감에 수긍이 간다.

다 마시도록 꺼지지 않는 폭신한 우유 거품은 신선하고 두꺼워서 아이스크림처럼 떠 먹어도 될 정도며, 한국 대표로 세계 바리스타 대회에 나갔던 여대승 씨가 직접 뽑아주는 핸드 드립 커피는 새콤한 첫 맛과 묵직한 보디감이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디자이너 사장이 꾸민 심플한 실내 곳곳에선 감각적인 월 페인팅이나 독특한 코스터처럼 소소하지만 눈길 가는 볼거리를 만날 수 있다. 7단의 계단 아래에는 193종의 최고급 와인들도 숨어 있다. 요리 수준의 롤 베이컨 샌드위치도 마니아들의 발길을 이끄는 원동력.

 

 

 


La Lee _ 신선함과 어울림의 맛

추천인 : 홍성종 (<월간 Coffee>기자)
'모든 재료가 늘 신선한 상태에서 유통되기 때문에 언제 들러도 갓 볶은 원두의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알려진 그대로, 국내 최고를 자부하는 다양한 케이크 맛도 일품이고요.'


라리? 얼핏 들으면 잔뜩 멋 부린 이름 같지만 알고 보면 프랑스어에서 명사를 수식하는 ‘la’에 이씨의 ‘Lee’만 붙인 것. ‘이씨네 집’이라는 소박한 뜻이다.

‘이씨네 집’은 한옥을 닮은 내실을 하나 더 가진 독특한 구조. 연예인들의 아지트로도 유명하다. 미식가들이 이곳 커피에 열광하는 이유를 묻자 매니저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루 두 번 신선한 재료를 받아 당일 모두 소화하니 늘 좋은 커피 맛을 유지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

국내에선 흔치 않게 천을 이용해 커피를 추출하는 넬 드립 방식을 사용하는 것도 부드럽고 그윽한 커피 맛의 이유다.

커피만큼이나 유명한 케이크를 곁들인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 조각 케이크는 4,500원이며 한 상자는 4만1,000원이다. 주문이 많으니 미리 예약하고 들를 것이다.


자료 제공 : 위클리 프라이데이

by 리아 | 2007/02/05 17:15 | Coffee N Tea | 트랙백(1) | 덧글(3)

다음주 월욜부터..드뎌..교육시작!

다음주 월요일부터, CBSC에서 전문바리스타 훈련시작이다~
ㅋㅋ..
아~ 생각만해도 신나~^^
 

by 리아 | 2007/01/24 13:00 | Coffee N Tea | 트랙백

PAPER TAINER MUSEUM에 다녀오다.

올림픽공원에 있는 페이퍼 테이너에 다녀왔다..
페이퍼 테이너는.. 디자인 하우스가 창사 30주년을 맞이한 기념으로, 세웠는데..
353개의 페이퍼 튜브와 166개의 컨테이너 박스로 지었기 때문에.. 페이퍼 테이너라 이름하였다.
작년 연말까지만 하는줄 알았는데... 연장했다고 해서, 부랴부랴 다녀왔다~^^
특별히.. 30개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국내의 역량있는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이 표현한 갤러리들이..정말 압권이었다.
그들의.. 아이디어에 정말 많이 감탄했고..
인간의 상상력이 무궁무진 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시간들이었다.






by 리아 | 2007/01/21 00:10 | Everyday | 트랙백

이것이 크리에이티브 경영이다



<기획>‘C파워’ 시대 “상상하라”
 

크리에이티브 경영 핵심은 기성의 전복이나 파괴다. 상상이나 차별, 혁신 등을 무기로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고 이를 경영현장에 접목시킨다. 지식사회를 넘어 창조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21세기, 기업이나 최고경영자(CEO)들은 크리에이티브 경영을 화두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고 있다. 기업들의 크리에이티브 경영사례를 알아본다.

뒤집어라=창의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뒤집는 데서 시작한다. 획일적 사고방식으로는 ‘영원한 2등’에 그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공정기술에서 40나노의 벽에 막혀 있었다. 미래 반도체 개발을 위해서는 초미세화 공정개발이 필수였지만 기존 공법으로는 도저히 해결방안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전하를 도체에 저장한다’는 생각을 180도 뒤집고 전하를 부도체에 저장하는 CTF 기술을 개발해 난제를 해결했다.

삼성전자는 이 기술로 반도체업계의 ‘마의 벽’으로 여겨졌던 40나노를 정복하며 ‘40나노 32기가 낸드플래시’를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이 기술은 기가의 1000배 시대인 ‘테라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핵심기술로 20나노까지 확대 적용, 10년간 250조원 이상이라는 천문학적 부가가치 시장을 열었다.

애플의 아이팟 나노 역시 대표적인 역발상의 승리. 애플은 2001년 2500만달러의 적자로 파산 직전까지 몰렸지만 그해 10월 선보인 MP3플레이어 ‘아이팟’을 4년 만에 1000만개 이상 팔며 급반전됐다. 애플은 다른 회사들이 MP3플레이어의 기술적 요인에 초점을 맞출 때 온라인 음악사이트인 ‘아이튠즈’를 만들어 ‘기계+음악=신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새로운 공식모델을 만들었다. 소니의 워커맨의 신화를 역사 속으로 잠재운 스티브 잡스는 일약 세계적인 크리에이티브 경영자로 떠올랐다.

상상하라=상상은 스토리를 만든다. 디지털 시대에 상품과 서비스에 스토리를 담는 것은 히트상품의 1순위 조건이다. 스토리를 가진 온라인 게임 리니지는 물론 홍콩의 최고의 바인 ‘매드독’은 연재만화로 된 메뉴판으로 세계적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강우현 남이섬 사장은 상상경영으로 남이섬을 한류문화를 전파하는 문화휴양의 성지로 만든 인물. 강 사장은 풍부한 상상력을 토대로 남이섬을 ‘나미나라 공화국’으로 선정만들어 독자적인 화폐와 우표, 문자를 만들어 마치 관광객들이 단순 휴양지가 아니라 동화나라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놀이공원 대신 갤러리, 박물관 등 문화전시장을 대폭 늘리고, 타조 토끼 등을 풀어 자연적 느낌을 최대화시켜 누구나 가고 싶은 상상의 섬으로 만들었다.

주몽 역시 상상을 바탕으로 만든 히트상품이다. 주몽은 과거 소재를 현대적 상상력으로 복원해 시청자를 매료시킨 대표적 문화상품으로 한국판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 시리즈로 불린다. 특히 주인공이 임무를 완수해 가는 ‘롤플레잉게임’형식을 빌려,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남 다르게 하라=4대째 농사를 짓는 가난한 충청도 산골 출신인 윤석금 웅진 회장. 맨손으로 출발, 2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창조경영이 자리잡고 있다. 정수기인 웅진코웨이 렌털 시스템은 윤 회장의 창조경영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정수기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외환위기가 닥친다.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 창고에 재고가 쌓여갔다. 윤 회장의 역발상은 창조로 이어진다. 쌓여있는 재고를 어떻게 팔지란 생각보다 빌려주자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정수기를 파는 게 아니라 빌려주자라는 창조적인 발상 하나로 지난해 렌털 회원 수가 420만명에 달하고 매월 10만명의 새로운 회원이 들어올 정도로 빅히트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남 다르게 하라’ ‘크고 넓게 바라보라’ ‘지식정보를 활용하라’는 게 윤 회장의 창조경영론의 핵심이다.

이노베이터가 되라=산업디자인계의 ‘구루(큰스승)’ 소리를 듣는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 그는 스스로를 트렌드를 창조하는 ‘이노베이터(Innovator)’라고 말한다. 2003년 김 대표는 길거리나 카페에서 MP3플레이어를 갖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유심히 본다. 목걸이 따로, 이어폰 따로, 주렁주렁한 느낌은 뭔가 어색했다. 목걸이에서 이어폰이 바로 빠져나오게 하면 안 될까. 기왕 목에 걸고 다닌다면 정말 패션 아이템인 목걸이 같은 MP3플레이어를 만들어 보자. 이렇게 시작된 상상은 아이리버의 ‘N10’이란 모델로 이어졌고 6개월 만에 25만대 판매, 유럽의 권위 있는 디자인상인 ‘레드 닷 어워드’를 받았다.

김 대표는 이노베이터의 조건으로 ‘무난함을 버리고 확실한 차이를 만들어라’ ‘사소한 일상에서 보물을 발견하라’ ‘삶을 모험처럼 즐겨라’ ‘쓸데없는 것을 찾아내고 버려라’ ‘좋은(Good) 것보다 적절한(Right) 것을 만들어라’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호하기 위해 실현하라’를 말하고 있다.

by 리아 | 2007/01/03 11:06 | 트랙백

오설록을 가다.







오설록을 갔다..

그러나...

5시에 폐점을 하는 것을 알지못하고, 늦게 방문하여... 오래 머물지 못했다는..ㅜㅜ

by 리아 | 2007/01/02 19:36 | Everyday | 트랙백

바다와 섬..





이중섭 미술관 옥상에서 바라본.. 섶섬..



by 리아 | 2007/01/02 19:30 | Everyday | 트랙백

산책코스~




 

너무나 아름다웠던 산책로~

by 리아 | 2007/01/02 19:23 | Everyday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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